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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전환점, 북미건축 현장을 향하여_전원속의 내집 2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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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 68회 작성일 23-09-18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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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서양식 목조주택이 도입된 초창기, 이재원 씨는 우연히 마주친 한 건축현장에 반해 일본과 미국을 거쳐 캐나다로 멀고 먼 여정에 오른다. 20년 후, 한국에 돌아 온 그가 북미 건축 경험담을 지면에 풀어 놓는다. 편집자 주.


벌써 20여년이 훨씬 지났다. 1990년대 초반, 국내에 북미 목조주택이 막 상륙했다. 내가 현장을 처음 접한 곳은 경기도 일산의 정발산 지구이다. 체격은 한인들의 두 배나 될 듯한 외국인들이 선글라스를 끼고 느릿느릿한 몸짓으로 골조를 올리고 있었다. 건축 현장에서 전형적인 노동자의 모습만 보아왔던 나에게 이들의 모습은 낯설고 신기한 광경이었다. 들기에도 버거울 만한 해머를 한 손에 잡고 난생 처음 보는 기계를 사용하여 능숙한 기술로 나무를 자르고 현장을 이끄 는 인상적인 분위기였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현장 모습에, 나는 내 일은 제쳐놓고 보름 넘게 정발산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당시 건축사무실을 운영하던 친구와 동거동락하다, 건축에 발을 들여놓고 한창 그 재미를 느끼고 있을 때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돈을 번다는 생각이었지만, 현장을 나갈 때마다 무(無)에서 유(有)를 이루는 건축이 흥미로웠다. 건축 이 내 천직이라 여기고 열과 성을 다한 결과, 20년 전 내 이름으로 건축 사업자를 등록하고 영역을 넓혀가게 되었다.


첫 번째, 목조주택을 찾아 일본으로 떠나다.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나타나는 나를 보고, 그들은‘테이크 픽처’라며 웃기도 했다. 같이 기념사진 을 찍자는 말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캐나다 현장에 와서 보니‘아예 우리를 찍어가라, 찍어가’라는 비꼬는 말이었다는 것을 알고 캐내디언 친구와 한참을 웃기도 했다. 스토커처럼 현장을 지켜보던 어느 날, 나는 매운 결단을 했다. 상황과 기회를 기다리지만 말고, 목조주택의 원조인 나 라에서 직접 부딪혀보자. 당시 나는 그 나라를 일본이라고 생각하고 오사카에서 목조주택 사업을 하는 이와다 씨를 만 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오사카에서는 꽤나 볼륨 있는 건축 사업을 운영하는 이와다 씨는 매우 친절했고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나 또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나는 거미줄만한 인연이라도 다 잡겠다는 일념으로 많은 현장을 둘러보고 실무적인 일에도 적극 가담했다. 그러나 어쩐지 일본의 현장은 매우 수동적이고 많은 부분이 수작업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시간 은 속수무책으로 흐르고 있는데 한달이 지나도 현장은 별반 다름이 없었다. 심란해하는 내 마음이 부질 없었던 걸 나 중에서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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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지진 때문에 워낙 건축허가가 까다롭고 건축법과 공정을 심사숙고 잘 실행해야만 완벽한 건물로 허가받을 수 있다. 수도권에서 좀 떨어진 지바에서도 현장 분위기는 여전히 느긋했고 심각했다.

일본에서의 시간은 어느새 세 달을 훌쩍 넘기고, 한국으로 돌아와 보니 커피와 빵으로 식사를 하던 외국인들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정발산 현장에는 이미 완성된 목조주택들이 새 주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는 미련만 잔뜩 남아 있었고, 목조 건축의 본고장만으로 알고 있었던 일본에서 북미건축의 해법은 얻지 못하고 돌아온 시간이 실망스럽기만 했다.


두 번째, 미국으로 가 전문가의 조언을 듣다. 

더 늦기 전에 목조의 본고장을 향하여 도전하고 싶었다. 결국 1991년 6월, 설레임과 두려움을 함께 안고 시카고로 떠났다(당시에 비자 받기는참으로 힘들었다. 1회용 단기 비자라도 받으면 다행이었다. 다행히 난 4년 전, 개인적인 일로 10년 치 상용비자를 받아놓은 터였다).

디토로이트에서 갈아타야 했던 비행기의 연착으로 엉뚱한 비행기를 타고 오지로 갈 뻔한 에피소드를 겪으며, 우여곡절 끝에 시카고에 무사히도착하였다. 이미 시카고로 이민와 정착한 친구가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옛날 동거동락하던 그 친구였다.

역시 시카고는 듣던 대로 바람도 많고 천지가 꽃이었다. 울창한 나무와 유리같이 맑은 하늘도 나를 반기는 것만 같았다

시카고의 저택 촌은 1구획에 집이 딱 네 채씩 밖에 없었다. 포르쉐와 람보르기니 등 고급 차종들이 즐비해 수입차 박람회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갖게 하였다. 일반적으로 한집에 가라지(Garage)가 4개 이상씩 되었고, 가구당 소유하고 있는 차들은 대여섯 대가 넘었다. 내게는 낯설고놀라운 풍경이었다. 이 주택들이 모두 목조로 지어졌다니, 호기심 가득한 마음에 내가 이 현장에 와 있는 현실이 꿈만 같았다.

시차 적응은 내겐 사치였고, 금쪽같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다음날 아침 전투태세로 다운타운을 향해 나섰다. 언어 습득은 필수였고 무엇보다자신감을 얻고 싶었기에 커뮤니티를 찾아가 랭귀지코스 오전반에 등록을 했다. 일을 배우기 위한 출발점이기도 했지만, 공짜여서 더 좋았다.

한인들이 건축을 하고 있는 건축사 사무실과 현장을 답사하여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침묵 속에서 무표정의 작은 체구로 일하던 일본인들과는 달리, 적개심 없이 서로 평등한 관계로 일하는 북미의 현장은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할리우드 배우처럼 선글라스를 끼고 몸 여기저기 문신을 새겨 넣은 그들의 자유분방함은 왠지 사람을 편하게 만들었다.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일하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지만, 이 평범함이 한국 건축시장에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차가운 편견으로 가득한 한국 건축 계를 생각하니 마음이 씁쓸하였다. 건축업을 하고 있는 친구의 도움으로 목조 주택을 설계하는 한 미국인 교수를만난 것은 운명이었다. 그는 한국과 위도가 비슷하여 사계절이 뚜렷하고 강수량과 강우량이 비슷한 곳에서 건축을 배워야 한국에 돌아가서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충고했다. 치안이 좋고, 앞으로 개발 여건이 좋은 캐나다를 추천해 주었다.


세 번째, 목조의 본거지 캐나다로 떠나다. 

내게 캐나다는 그리 낯선 땅은 아니었다. 건축을 막 시작할 무렵에 이미 호주와 뉴질랜드를 답사하고, 같은 건축업을 하고 있던 막내 동서와 함께 캐나다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때 토론토는 하필 천지사방이 얼어붙은 겨울이었기에 다음해 다시 방문하기도 했다.

시카고의 다양한 사람들에게 목조건축의 해법과 정보를 값지게 얻고, 한국행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실었다. 희망이 빵처럼 부풀어 오르는 캐나다를 향하여 내 마음은 벌써 짐을 꾸리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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