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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마스터 라이센스를 취득까지_전원속의 내집 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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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 64회 작성일 23-09-18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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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마스터 라이센스를 취득하기까지 _ 1편
 

국내에 서양식 목조주택이 도입된 초창기, 이재원 씨는 우연히 마주친 한 건축현장에 반해 일본과 미국을 거쳐 캐나다로 멀고 먼 여정에 오른다. 20년 후, 한국에 돌아 온 그가 북미 건축 경험담을 지면에 풀어 놓는다. 편집자 주


멀고 먼 길을 돌아 캐나다로 떠나다 

1999년 5월의 어느 저녁, 나는 김포공항에서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정식으로 유학길에 오른 것도, 취업을 위한 기술이민을 택한 것도 아니었다. 오랜 꿈을 실현하고야 말겠다는 의욕 하나로 나는 또 다시 캐나다로 향하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그것은 내 안에 있던 뜨거운 열망, 선진 목구조 건축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토론토 공항에 도착한 새벽 날씨는 더욱 춥게 느껴졌다. 드디어 목조건축의 현장, 캐나다에왔는데, 앞으로 어떻게 부딪혀 나아갈 것인가? 무작정 한인사회를 찾아가기로 했다. 새벽 미명이걷히고국적없는꽃들이만발해있던한인타운으로들어갔다‘. 미도파백화점한일관’이라고 쓰인 낯익은 간판이 나를 반겼다. 커피 향을 쫓아 조그만 카페테리아에 들어섰다. 캐나다 현지에서 발행하는 한국일보를 발견하고 정보를 얻고자 열심히 읽었다. 한인사회에 대해어느 정도 느낌을 받고 거리로 나왔다. 드넓게 펼쳐진 Christ Park을 보면서 도시 전체를 안은것 같은 여유가 느껴졌다. Bloor Street과 Christ Street에는 낯익은 한복차림의 꼬마들과 한인들

이 아침 일찍부터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고전의상을 입은 단체를 보며 의아해 물었더니 오늘이 단오절 한인행사가 있는 날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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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았다. 오전 9시부터 시작한 행사를 구경꾼이 되어 재미나게 지켜보고 교민들에게 박수도 쳐주었다. 하늘과 땅이 맞닿을 만큼 청명한 하늘이 아름다워 사진도 두어 컷 찍었다. 시간차를 극복하기 위해 일부러 저녁이 되도록 잠을 자지않았다. 오후에는 Christ Park의 수영장 보수공사 현장을 구경하고, 북미에서 가장 크다는 홈-디포(The Home Depot)를 찾아갔다. 그곳은 어마어마한 자재상이었다. 약 2만평의 실내에 1만여 가지가 넘는 자재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은 규모에 놀랐지만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무들의 질감이었다. 제재소에서 온 나무들이 촉감이 어찌나 좋던지, 꼭 아기 피부를 만지는 것 같았다.

건축자재상만 일주일이 넘도록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곳에서 반갑게‘Made inKorea’를 접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지 못한 꽈배기 모양의‘못’이었다. 한쪽 귀퉁이에 잘 정리되어 있는 못 박스들이 새삼 정겹게 느껴졌다.



Joe와의 운명적인 만남 

이민사의 교민이 다 그렇듯 여기 사람들도 주일이면 대부분 교회를 간다. 막내동서 식구들과 예배를 참석했고 그곳에서 나의 캐나다 인생의 첫 단추가 되었던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Kim’s Electric의 김영호 대표로 한국인을 빚낸 50인에 선정되기도 한 이였다.흔히‘이민을 가면 처음 만나는 사람에 따라서 그 사람의 운명이 정해진다’고 말한다.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 예배를 마친 후 인사를 나누고 캐나다에온 목적을 말했다. 김영호 대표는 Pine Hill Construction 대표인 Joe를 나에게 소개했다. Joe는 당시 70여 세의 할아버지였다. 20세에 오스트리아에서 이민을 와서 50년 이상 주문주택만 지었던 회사의 대표였다. 은퇴를 한 당시에도 과거의 고객으로부터 건축 요청이 쇄도하여, 그간의 노하우를 누군가에게 전수해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Joe가 유럽 출신의 캐나디언이다보니 유럽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의 주택건설 현장을 다니게 되었다. 그곳에서 본 색다른 광경은 현장의 일꾼들을 대하는건축주들의 태도였다. 가는 곳마다 따뜻한 커피를 내주고 동등한 입장으로 맞아주는 그들의 모습에 부연설명이 필요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그들을 대하면서 우리가 정해놓은 규칙과 편견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한국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비로소 행복도 관계 속에서 느낄 수 있다는 걸 이곳에서 알 수 있었다. 덕분에 늘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배우는 일의 즐거움 

한 번은 ETOBICO의 유럽인 집성마을에서 벽난로의 박스와 맨틀을 만들어 준 일이 있었다. 덩치는 나보다 두 배나 됨직한 건축주 부인이 나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빙글빙글 춤을 추면서 고마움을 표했다.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물건을 너무도 아름답게 만들어 주어 고맙다는 것이었다. 지구 저편에 부족하기 그지없는 노동꾼을 최고로 인정해주던 날이었다. 언어의 장벽과 인종차별이라는 거대한 숙제를 어찌 이겨 나갈 것인가 아스팔트 위에 뿌리내리기만큼 힘들 거라는 예상과 달리 나의 일들은 순조롭고 기대 이상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 후 그 부인은 자기 집에서 사용하던 많은 고급가구를 내게 선물로 주기도 하였고, 지인들에게 꾸준

히 건축 일을 소개해주었다. 그렇게 3년 동안 주문식 고급주택현장에서 일을 배우고 기술을 습득하는 시간을 보냈다.



나만의 건축회사를 설립하다 

차차로 건축에 대한 자신감이 붙으면서 나 자신의 브랜드로 목조주택 건축을 하고 싶었다. 나아가 한인사회로 활동영역을 넓혀야 할현실적 필요도 느꼈다. 내게서 집을 지었던 건축주들을 포함한 주변의 권유도 힘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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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998년에 건설사업자 등록을 하고 건축회사‘Western Lee Construction’을 설립하였다.

전기, 설비, 가스, 시설물에 대한 시공, 안전을 주제로 한 각종 세미나에 참석하며 기술을 습득하는 한편으로,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세네카 칼리지(Senaca College)에서 공부하기로 하였다. 미국도 그렇지만 캐나다에는 칼리지에서 각 전문 부분에 대해 6개월 또는 1년 기간으로 수료하는 교육프로그램이 많다. 본인만 부지런히 하면 얼마든지 공부하여 Certificate(수료증)를 받을 수 있다.

한국에서 건축을 하는 젊은 건축가(팀장, 숙련공)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 이 부분이다. 한국에서의 학벌과 학과에 관계없이 해외(선진국)로 눈을 돌려보라는 것이다. 기술이민이라 생각하면참으로 벅차고 준비도 많이 해야 하지만, 기술을습득하고 본인의 경험을 쌓기 위해서라면 많은 길이 있다. 해당 분야의 선진국으로 나가면 넓은 세상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 건축지식은 좁은 벽돌 틈 사이로 세상을 들여다 본 것과 같다는 생각이다.



목수가 꿈인 신부님과의 만남 

토론토에는 2곳의 한인 성당이 있다. 이 중 한 곳인 이소사 성당의 김인주 신부님이 무슨 입소문을 들었는지, 나를 찾아왔다. 이소사 성당은 3만여평 부지에 교인이 5천명인 큰 규모의 성당이었는데, 교육관을 신축할 계획으로 건축업자를 물색하는 중이었다.

이미 건축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신부님은 나의 건축 역량에 관해 직접인터뷰했다. 구체적인 공정에 이르기까지 진지한 토론이 이어지는조심스러운 인터뷰였다. 그리고는 흔쾌히 계약이 성사되었다.

6개월간의 교육관 건축은 참으로 즐거운 경험이었고, 캐나다에서대형공사를 하는 첫 삽을 뜨는 순간이었다. 한국에서 공사할 때 종교기관의 공사가 힘들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사공이 많아서 배가산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성당 측에서 어느 누구도 내가 하는 공사에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건축위원장과 신부님 외에는 공사현장에서 눈으로만 보지 입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 이상의 교인들이 관심을 갖고 찾아와서 다과며 식사를 제공해 주었고, 수고한다는 격려의대화를 나누었다. 성당 내에서는 일주일에 3회 건축위원회의 모임이 열렸고 신부님은 그 결과만을 가지고 나와 논의를 거쳤다. 일을마친 저녁에는 신부님과 마주앉아 다과를 나누는 시간이 많았다. 어느새 나와 신부님과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공유하는 오랜 친구 같은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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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임하시면 신부님은 목수가 되시겠단다. 사실 건축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셨고 다양한 기능도 갖고 계셨다. 시공자의 입장에 대한깊은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신부님은 교인들에게 건축현장에 시공에 대한 의견을 말하지 못하게 하셨던것이다. 물론 건축에 대한 의견이 있는 사람은 건축위원회에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건축위원회에서는 그것을 종합하여 그 결과를 신부님께서 나에게 직접 통보하셨다.

8월에 시작한 공사는 늦가을이 되어 길이 60m가 넘는 천정 대들보 공사가 끝이 났다. 어찌나 좋으셨던지 신부님은 나에게 낚시여행을 제안했다. 우리 가족과 함께 한 여행에서 신부님은 한 자연인으로서의 속내를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여행은 건축주와 시공자와의 상호 이해를 더욱 깊이 있게 해주었다는 측면에서 내게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시각적 능력, 자기만의 표현, 사람을 배려하는 건축, 그 모두가 중요하지만 환자가 의사의 처방을 받듯이 건축주는 건축가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길 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신부님의 말씀이 내 가슴에 지금도 남아있다.

공사를 시작할 때 마냥 푸르렀던 은행나무가 더 이상 푸르지 않았고 어느새 그 위로 차양이 무너져 내릴 만큼 어마어마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에 맞추어 준공을 하기로 계획하고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2교대 작업으로 열심히 일했다. 마침내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12월 크리스마스에는 모든 학생이 참석하여 성탄 미사를 드릴 수 있었다. 나로서는 캐나다에서 처음 이루어낸 대규모 공사였다. 토론토 공항에서의 첫 느낌 이후 캐나다에서 겪은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가슴이 뭉클한 순간이었다. 하나의 작은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1등은 커녕 중간쯤이라도 좋겠다던 애초 마음은 어디로 가고, 그 순간 만큼 최고가 되고 싶었다.

공사하는 기간 여러 차례의 시공무원의 건축 심사(Inspection)를 통과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언어에서도 힘들었지만 한국의 건축 환경과 캐나다의 건축 환경은 많은 차이가 있었다.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서울보다 약간 추운 지방이었기에 단열과 동파 방지, 결로 방지를 위한 검사는 참으로 꼼꼼하였다. 내가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검사관이 직접 팔을 걷어 부치고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법조항을 찾고 원리를 이해할 때까지 끝까지 가르쳐주는 그들을 보며 우리 현실과 많은 차이를 실감했다. 커피 한 잔 사겠다고 하는데도‘노 땡큐(No Thank)’다. 그것도 뇌물로 생각하는지 그들은 절대 사양했다.

우리는 어느새 친해질 만큼 자주 보는 사이가 되고, 이심전심 눈으로 듣고 눈으로 말하는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큰일도 해냈다는 자신감에 언어의 장벽으로 침묵을 종교처럼 받아들였던 내 입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언제보아도 질투나도록평화스러운도시. 이낯선이국땅에서나도슬금슬금행복해지고있었다. 섬을떠나야섬이보인다고했다‘. 어제보다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 내일이 나을 것’이라는 신념으로 프로액티브한 미래를 향해 캐나다에서의 네 번째 겨울이 가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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