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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마스터 라이센스를 취득까지2_전원속의 내집 2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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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 58회 작성일 23-09-18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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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마스터 라이센스를 취득하기까지 _ 2편


국내에 서양식 목조주택이 도입된 초창기, 이재원 씨는 우연히 마주친 한 건축현장에 반해 일본과 미국을 거쳐 캐나다로 멀고 먼 여정에 오른다. 20년 후, 한국에 돌아 온 그가 북미 건축 경험담을 지면에 풀어 놓는다. 편집자 주


캐나다의 겨울은 참으로 길다. 10월이 되면 가을을 느낄 겨를도 없이 할로윈데이를 기점으로 첫눈이 내린다. 순백의 눈발 속에 아침이 오고 해가 저물기를 반복하며 마치 크리스마스 카드 속에 갇혀버린 느낌이다. 겨울이 너무 길다보니 겨울 우울증 환자가 많다. 5월에도 가끔은 눈이 내릴 정도다.

어느덧 긴 겨울이 가고 또 다시 노랑노랑 봄이 오고 있었다. 꽃이 피기 시작했고 날은 더 이상 추워지지 않았다. 두툼한 코트를 벗어던지고 모두 화려하고 아슬아슬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지루하지 않은 캐나다의 풍경을 한 자나 더 길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활기를 띠고 건축하는 사람도 일손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반가운 동료들의 안부를 물으며 봄과 함께 그들이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


건축 현장에서 만난 캐나다인들의 삶 

동료들은 일하는 내내 각자의 겨울 여행을 이야기한다. Alex는 친구들과 함께 스노우차를 타고 Algonquin park을 다녀왔단다. 우리 가족도 Algonquin에 다녀온 적이 있다. 우리나라 면적의 4배 크기인 어마어마한 공원에서 그때 죽을 고비를 넘겼다. 상상도 안 될만큼 큰곰이 나타나 텐트를 부수려고 했던 일이다. 냄비며 식거리들을 모두 텐트 안에 넣어두고 자다가 당한 일이었다. 라이터를 켜고 순간을 모면했지만 절대로 먹을 것은 사람과 가까이 두어서는안 되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다.

Roofer(지붕전문가)인 John은 11월이면 무조건 캠핑카를 몰고 와이프와 Florida 해변에서 따뜻한 여름을 보내고 돌아온다. 그 추억으로 삶의 활력소를 얻는다고 한다. 기온이 영하 20도(이 정도면체감온도가 족히 영하 30도는 된다)로 내려가는 날이면 John은

Florida 해변의 비키니 동영상을 보여주곤 한다. 이 또한 그들이 겨울을 슬기롭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반면, 우리 한인들은 겨울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한다. 캐나다인들에게는 보편적인 여가 문화이지만, 아직 우리 한인들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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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목수로 일한 지 25년째고, John은 초등학교를 4학년에 중퇴하여 35여년을 지붕 시공만 하였다. 다들 자기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이들은 일찍부터 자기가 뜻한 분야에 투신하여 그 일에만 전념한다. 그 결과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닌 사람보다 여유있는 삶을 살고 있다. 쉬는 날이면 간혹 우리는 온타리오 호수에서 만났다. 회사에 150명의 목수가 있으며, 각자가 요트를 갖고 나와서 가족과 동료들과 함께 여가를 즐긴다. 요트만 해도 가격이 보통 100만 불이 넘는 것들이다.

이처럼 전문직에 종사하는 이들의 여가생활은 대단하다. 어려서부터 직업을 선택하는 기준, 학업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게 때문에 사람을 만나고 여가를 보내는 생각도 우리와 달랐다. 사귐에 논리정연함을 따졌던 대인관계가 상대의 눈높이에 맞춰지기 시작하면서 내 가치관의 지축이 흔들리고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하늘처럼 맑아보여서 내 생활도 덩달아 행복했다.



리노베이션 공사와 감리사 Bob과의 인연 

토론토에서 북쪽으로 200㎞를 가면 세계 5대호의 하나인 Huron호 접경에 아름다운 도시 Owen Sound가 있다. 그곳에 300여 평 규모의 건물 리노베이션 공사를 맡게 되었다. 100여 년 이상 된 건물이었는데, 헐지 않고 내부 구조를 변경하고 지붕을 한층 높이는 작업이었다. 한국도 지방자치단체마다 건축 조례가 다르듯 캐나다는 워낙 땅이 넓어서 지역마다 지역 건축 조례를 따른다. 도면을 갖고 시청에 찾아 갔더니, 중국 사람이냐고 묻는다. 한인이라고는 한 가구밖에 살지 않는 곳이니 그럴 법도 했다. 한국 사람이라고 대답하니, 자기는 한국 사람을 본 적이 없단다. 나는 열심히 한국을 설명했다. 88올림픽을 하고 현대자동차를 생산한다고

했더니, 60살이나 되어 보이는 Bob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포니가 현대차냐고 물었다. 나는 자랑스럽게 맞다고 했고 Bob은‘쓰레기 같은 차’라고 하는 것 아닌가. 15년 전, 값이 싸고 좋다고 하여 구입했는데 그해 겨울을 지내지 못하고 고장나서 이를 버리고 미국 차를 탄단다.

나중에 알았는데 처음 수출된 포니가 영하 40도 이하의 도시에서 견디는 것은 당시의 기술수준으로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의 기술은 후진국 수준이라면서 나에게‘Good luck! ’을 외치며 헤어졌다. 좋은 첫 대면이 아니라서 시공 검사 통과까지 까다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사를 시작하고 한달쯤 지났을 때, 사각 모자와 망토로 정복차림을 한 두 사람이 현장을 방문했다. 경찰 제복과 비슷하여 처음에는 경찰인줄 알았다. 모자에‘Inspector(감리자)’란 글이 써 있었다. 시공검사 의뢰도 하지 않았는데 찾아온 것이다. 그들은 여기저기를 꼼꼼하게 체크하더니‘당신은 인스펙터보다 기술이 좋은 엔지니어’라며 극찬을 해주었다. 갑자기 들은 칭찬에 당황했다. 나중에 그에게 들어보니 포니 만드는 나라에서 온 사람이 집을 짓는다고 해서 믿음이 안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중간 점검을 하면서 교육시켜 주려고 왔다가 본인이 한 수 배웠다며, 또 한사람의 훌륭한 협조자를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했다. 그 후로 그는 나를 마스터 빌더의 자격을 갖춘 빌더로 대우해 주었다.



건축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쌓다 

그 후로 두 번의 봄이 지나고 내게는 많은 변화와 성장이 있었다. 나날이 일어나는 일상의 소중함에 감사했고, 거미줄만한 인연에도 늘 최선을 다했다. 배우고 익힐점이 보이면 멘토로 삼고 딸려오는 사이드 메뉴처럼 쫓아다니기도 했다. 메모하는 습관도 그때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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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부동산 가치로만 삼는 터무니없는 의식이 완전히 바뀌고 그들처럼 건축을 문화로 바라보는 의식도 생겼다. 배우는 연기만 잘하면 되고 가수는 노래만 잘 하면 되겠지만, 건축은 그것과는 성질이 다르다. 주위와 어울려야 하고 시공자, 디자이너, 설계자, 현장지원, 날씨, 건축주, 감리자 모든 분야가 잘 조합해야 완성되는 것이 건축이다. 사람의 삶에 공간의 힘이 끼치는 영향은 대단한 것이다. 집은 그 사람의 삶까지도 변화 시킬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편리하고 소통이 잘되는 적합한 공간에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집짓는 일이 하루 세끼 밥을 먹는 것처럼 망치만 들면 지어지는 모습에 나도 내가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집을 한채 지으려면 10여 번에 걸쳐 시청 검사관이 현장을 방문해 지적하는데, 이제는 그런 사항을 걱정 없이 통과하게 됐다. 비로소 나는 건축이 기능적이고 개성적이고 인문학까지 깃든 광범위한 분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마스터라이센스 취득과 나의 새로운 꿈 

2002년 꿈만 갖고 찾은 서구의 목조주택 현장에서 6년을넘게 지내고 있었다. 캐나다에서는 건축현장에서 9,000시간 이상 사고 없이 실무를 하고, 모든 시공검사를 통과하면 마스터면허를 취득할 수 있다. 작업 시간은 매주 35시간으로 계산한다(35시간×52주×5년).마스터면허를 신청하고 기다리는 내내 지난 10여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정발산에서 키웠던 꿈을 실현키 위해 일본, 미국, 캐나다를 오가면서 배웠던 결실의순간이었다. 드디어 정식으로 마스터면허를 땄다.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가 제대로 된 서구식건축을 정착시키고자 한 새로운 꿈을 가졌다.

캐나다에서는 밥 먹듯 짓는 주택보다는 1천여 평 이상 되는 대형 건물로 영역을 넓혀갔다. 철골ㆍ목조ㆍ콘크리트가 함께 어우러지는 구조건축물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Don Hawkey Church Management LTD(www.churchbuilder.ca)라는 50년 역사를 가진 회사에 속해 있었다. 매년 7~10개의 교회를 동시에 건축하는 북미에서 제일 큰 규모의 교회건축 전문회사다. 유럽계 이민자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된 회사로, 150여 명의 직영 목수 중에 유색 인종은 나 하나뿐이었다.

토론토 북쪽 Vaughan City에 자리잡은 Vaughan Community Church(www.vccc.ca)를 지으며 나는 Supervisor로 현장을 이끌고 땅파기부터 지붕까지, 모든 공정을 진두지휘했다. 그 후 Mississauga Community Church, Richmondhill Refomed Church, Ancaster Reformed Church 등 대형건물을 수없이 지어보았다. 추위도 대단하지만 캐나다의 여름 또한 참 맹렬하다. 하오의 도시는 가마솥처럼 찌는 듯 했고 나는 캐나다에서마지막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노력이 기회를 만나면 운이라 했다. 이제 한국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2006년 가을,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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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보낸 건축 여정들 


벤쿠버 _ 캐나다는 지역마다 기후적인 특성이 크게 차이 나 건축공법이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도 부산과 강원도 평창의 동결선이 다른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밴쿠버는 캐나다의 서부에 위치한 평화로운 도시이다. 대서양을 끼고 형성된 해안 도시로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힐 만큼 깨끗하고 아름답다. 건축공법에서도 바다를 접한 도시적 특성에 맞게 배려할 부분이 많았다. 또한 비가 많이 오는 곳이라 외벽에 레인스크린(Rain screen)을 만들어 습기를 조절하고 있었으며, 적설량이 많지 않은 곳에서는 지붕 경사가 26.57(5/12)도 정도로 완만하다. 세계의 부호들이 노후대책으로 사는 도시로 건설 경기도 그다지 좋지 않고, 신축 수요보다는 보다는 증축과 개축이 많았다. 도시 전체가 갤러리 같았던 벤쿠버의 다운타운을 들어갔는데 정말 고흐가 문을 열고 나올 것만 같았다. 동화세트 같던 벤쿠버의 기억을 촘촘히 접으며 다시 캘거리로 향했다.


캘거리 _ 캘거리는 잠시 함께 일한 동료였던 필립의 초청으로 방문한 곳이다. 그는 Air Canada라는 북미에서는 아주 큰 항공사의 조종사였다. 그의 아버지는 캐나다로 이민 온 한국인이었지만, 그는 캐나다에서 태어난 터라 한국말이 유창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해고를 당했다. 결혼해 가정을 갖고 잘 살던 중산층이 한순간에 수입원을 찾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는 잠시 나와 함께 건축 현장에서 일했다. 일할 때면 벽체 위에 올라 앉아 비행기를 조종하는 흉내를 내곤 했다. 수십 개의 조종석 레버를 당기고 미는 흉내를 내며 실업자의 스트레스를 풀었다. 꿈에서도 조종석에 앉고 싶어한 친구였다. 그가 어느날 캘거리의 Fedex 화물 항공사로 취직을 하고, 일주일에 두 번 운항을 하게 되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방문한 캘거리의 겨울은 우리나라 신의주 정도의 날씨로 매운 추웠다. 미국의 실리콘 밸리처럼, 캐나다의 IT산업의 핵심 지역으로 만든다는 계획이 있어서 주택단지에 신축 건물이 많이 지어지는 곳이다. 목수로서 이민을 계획한다면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기술 이민도 다른 지역보다는 쉽게 이루어지고, 수입도 많은 편이다. 캘거리에서 2주를 머무는 동안 필립과 친분도 더 두터워졌다. 바게트과 초승달 크로와상을 곁들어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즐거워했다. 캘거리에 많이 피어나던 하얀 아카시아 향기가 베개까지 스미는 것 같았다.


퀘벡 _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당시 선수촌 숙소와 부대시설로 모듈러주택을 시범 설치한 이후, 퀘백 지역에는 모듈러 공법의 인기가 높다. 올림픽이 끝나면 숙소를 다른 용도로 써야 하기 때문에 모바일홈으로 지어 이동시킨다. 퀘백에서 모바일주택을 건축할 기회가 생겨 1200㎞의 거리를 20시간넘게 차로 달렸다. 캐나다의 도로표지판에는 영어와 불어를 동시에 사용해 여행길이 불편하지 않으나, 몬트리올에 들어서면 불어만 사용한다. 말도 관공서를 제외하고는 불어만 사용한다. 자동차에 주유하기부터가 힘든 경험을 했다. 퀘백은 예술의 도시답다. 거리에는 미술가며 음악가들이 줄지어있고 집시들이 배회하는 모습은 시간이 잠시 멈춘 느낌이었다. 빨간 머리 공주 앤이 살았다는 집은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대만원이었다.

여행자는 현지인을 바라보고 현지인들은 먼 곳에서 온 여행자를 바라 본다. 그렇게 호기심으로 서로를 기억할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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